혹시 '해동성국'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바다 동쪽에 있는 번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이 웅장한 이름은 바로 우리 역사 속,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강대국 발해를 가리킵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옛 땅에 세워진 나라로, 한때는 당나라마저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동북아시아의 강자였죠. 오늘은 잃어버린 우리의 북쪽 역사, 해동성국 발해의 이야기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 발해, 고구려의 후예임을 선언하다
1) 건국 배경: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다 발해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멸망의 아픔을 겪은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의 지배에 저항하며 세운 나라입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각지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중 일부가 영주(營州) 지역에 모여 반발했습니다.
이때 고구려 장수였던 대조영은 아버지 대중상과 함께 말갈족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저항했습니다. 이후 대조영은 698년, 길림성의 동모산(東牟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 칭했습니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당나라와 대립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지방 정권이 아닌,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당당한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2) '발해'라는 국호의 의미와 인정 대조영은 당나라와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713년, 당 현종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의 작위를 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국호가 정식으로 발해로 바뀌게 되죠. 하지만 이는 당나라가 발해를 '지방 정권'으로 취급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발해는 이러한 당나라의 의도를 알면서도 실리를 택하여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자처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당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2. 해동성국, 그 이름의 의미와 전성기
1) 문왕(文王): 내실을 다지고 기틀을 세우다 발해의 3대 왕인 문왕(재위 737~793) 때에 이르러 발해는 본격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문왕은 적극적인 외교 정책과 내치 개혁을 통해 발해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 수도 천도: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현덕부를 거쳐 상경용천부로 옮기며 국가의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 통치 체제 확립: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3성 6부제를 도입했지만, 명칭과 운영 방식은 독자적으로 구성하여 발해의 주체성을 유지했습니다.
* 문화 발전: 유교 교육을 장려하고,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고구려의 전통을 융합하는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2) 선왕(宣王):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치다 발해의 10대 왕인 선왕(재위 818~830) 시기는 발해 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고 국력이 강성했던 시기입니다. 선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고구려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동해와 접한 넓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 영토 확장: 흑수말갈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습니다.
* 5경 15부 62주: 전국을 5개의 수도(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 15개의 지방 행정 구역(부), 62개의 행정 구역(주)으로 나누어 효율적인 통치를 실현했습니다.
* '해동성국'의 찬사: 당시 당나라의 문헌에는 발해를 "바다 동쪽에 있는 번성한 나라" 즉, '해동성국'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영토만 넓은 것이 아니라, 당나라조차 인정할 만큼 뛰어난 국력과 문화를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3. 발해의 독창적인 문화와 유적
1) 상경성(上京城): 발해의 심장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서 건설되었지만, 그 건축 양식이나 내부 구조에서는 고구려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습니다.
특히 궁궐 터 북쪽의 '용두산 고분군'에서는 고구려와 유사한 양식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2) 고분 벽화: 고구려의 전통을 잇다 발해의 무덤에서 출토된 정혜공주 묘와 정효공주 묘는 발해 문화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정혜공주 묘는 고구려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무덤과 유사하며, 정효공주 묘의 벽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유사한 인물 묘사, 풍속 묘사 등을 보여줍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예술적 전통을 계승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3) 온돌: 생활 속에서 이어온 고구려의 난방 문화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온돌은 고구려의 난방 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상경성 궁궐터에서 발견된 온돌 시설은 발해 왕실에서도 온돌을 사용했음을 알려줍니다.
4. 발해의 갑작스러운 몰락, 그리고 기억해야 할 이유
1) 멸망의 원인과 그 이후 강력했던 해동성국 발해는 926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침입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합니다. 멸망의 원인으로는 내부적인 혼란, 지배층의 분열, 그리고 거란의 급성장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은 여러 부흥 운동을 전개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부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여 발해의 유산을 이어가고자 했고, 고려는 이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습니다.
2) 발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발해는 우리 역사 속에서 한때 강력한 강대국이었지만, 그 역사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주 벌판에 당당히 섰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북쪽 역사입니다. 우리가 발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발해가 단순한 한반도의 역사가 아닌,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광활한 우리의 역사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발해사는 우리 역사 연구의 중요한 한 축이며, 현재 동북아시아의 영토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발해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를 위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는 데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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